일본이 한국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바꾼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날짜 바꾸는 차원 넘어...... '일본 어린이와 한국 어린이의 일체화' 노려
"오늘 5월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그런데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있는 것은 일본과 한국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에 창업된 출판사인 메이지도서 홈페이지의 '5월 5일은 소수파?'라는 기사의 첫 문장이다. 전 세계에서 어린이날이 5월 5일인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러시아나 중국 같은 옛 사회주의권에서는 6월 1일을 어린이날로 기념하는 경우가 많다. 194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민주부인동맹 회의 때 이날을 국제어린이날로 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진 결과다. 2020년 기준 48개국이 이날을 기념했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많이 기념되는 날은 11월 20일이다. 유엔이 세계어린이날로 정한 이날을 자국의 어린이날로 사용하는 국가는 2020년 기준 24개국이었다고 한다. 그 외의 나라들은 자국의 역사나 문화를 감안해 날짜를 지정했다.
위 홈페이지는 "한국에서는 방정환이라는 동화작가가 제청한 것이 계기가 되어" 5월 5일이 한국 어린이날이 됐다고 말한다. 잘못된 설명이다. 방정환이 5월 1일을 한국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한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지 못한 언급이다.
방정환과 색동회 회원들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은 천도교소년회 창립과 관련이 있다. 임재택 부산대 교수와 조채영 부산YWCA 보육교사교육원 교수의 공저인 <소파 방정환의 유아교육사상>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천도교소년회가 탄생한 지 1년 후인 1922년 5월 1일 방정환·김기전·구중회·차상찬·박달성 등 5인이 지도위원이 되어 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날이 바로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이었다."
1922년 5월 1일에 천도교소년회 1주년을 기념한 방정환은 1923년 5월 1일을 최초의 어린이날로 정했다. 그렇다면 천도교소년회가 5월 1일에 창립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 책에 따르면, 1923년에 발행된 <어린이> 창간호 기사인 '<어린이>를 발행하는 오늘까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봄 오월 초승에 서울서 탄생의 소리를 지른 천도교소년회. 이것이 우리 어린 동무 남녀 합 삼십여 명이 모여 짜은 것이요. 한국 소년운동의 첫 고동이었습니다."
초승이 초생(初生)이라는 한자로 표기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승달은 첫 출발의 이미지를 띤다. 그래서 보름달이나 그믐달과 달리 어린이 이미지에 가깝다. 일제강점기에는 양력을 썼지만, 음력을 쓰던 얼마 전까지의 그런 이미지를 활용해 5월 첫날에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되고 이를 계승해 5월 첫째 날을 어린이날로 기념하게 됐던 것이다.
소년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1947년 5월 1일 자 <경향신문> 기사 '소년운동 약사(略史)'에 "어린이날은 5월 중에도 첫쨋날인 5월 1일을 정하여"라는 대목이 있다.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5월 1일로 정한 것은 그날이 그달의 첫날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처음'이란 이미지를 어린이날에 부여하려는 방정환 등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5월 5일로 바꾼 일본제국주의
이렇게 정해진 날짜를 5월 5일로 바꾼 것은 일본제국주의다. 2021년에 <역사와 교육> 제33집에 실린 이주희의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아동보호일 제정과 그 성격'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아동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27년 5월 5일 아동보호일을 제정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아동보호일은 1926년 12월 2일부터 4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전국아동보호사업대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었다."
총독부가 5월 5일을 아동보호일로 제정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국의 전통과 맞추기 위해서였다. 무신정권인 가마쿠라막부가 일본을 지배한 12세기부터 5월 5일을 사무라이나 소년과 연관 짓는 관념이 있었다는 설명이 있다.
도쿄 후쿠토쿠신사의 최고 신관인 마키치 아키(真木千明) 궁사(宮司)는 야후재팬 뉴스에 실린 2017년 5월 5일 자 기사 '5월 5일은 어린이의 날'에서 일본인들이 중국 단오절에서 따온 5월 5일이라는 날짜를 어린이와 연관지은 것은 사무라이들이 일본을 지배한 가마쿠라막부 때부터였다고 설명한다.
마키치 궁사는 '언제부터인가 남자의 축하로 진화'라는 소제목 밑에서 "남자아이가 점점 결부된 것은 무사의 세상이 된 가마쿠라막부가 되고 나서"라며 창포로 머리 감기 같은 단오절 풍습이 사무라이와 연관됐다고 설명한다.
액운을 내쫓는다는 창포(菖蒲)도 '쇼부'로 발음되고 무예 숭상을 뜻하는 상무(尙武)도 쇼부로 발음되며, 창포 잎도 끝이 뾰족하고 무사의 검도 끝이 뾰족한 것이 단오와 사무라이를 연결하는 매개가 됐다고 마키치 궁사는 설명한다. 이 때문에 5월 5일이 처음에는 무사로, 다음에는 남자로, 그다음에는 남자아이와 연결됐다고 그는 기술한다.
이에 더해 5월 5일을 일본인의 숫자 관념과 연결하는 설명도 있다. 2020년 5월 13일 자 <아주경제>의 '강효백의 신(新)경세유표 28'에서 강효백 당시 경희대 교수는 "일본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이면"을 거론하면서 "일본인이 선호하는 수 5와 고도모(어린이)의 '고'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방정환이 5월 1일 어린이날을 만든 지 4년 만에 5월 5일 아동보호일을 내놓았다. 일제가 만든 이날은 아동애호데이나 유유아(乳幼兒)애호데이로 더 많이 불렸다.
5월 1일이 기념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총독부가 5월 5일 카드를 들고 나선 데는 노동자 세력에 대한 견제 심리도 작용했다. 위 이주희 논문은 "조선총독부는 5월 1일이 노동제일(祭日)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날의 취지에 대해 의심"했다고 설명한다. 친(親)자본적이 아닌 친노동적인 행사가 될 가능성을 의심했던 것이다.
일제는 1945년에 물러갔지만
일본이 5월 1일에 거부감을 가진 데는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1919년 3·1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의 충격을 받은 일제가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는 시점에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어린이날 운동이다. 위 임재택·조채영 책은 문화통치에 대한 민족주의 진영의 대응을 이렇게 설명한다.
"민족지도자들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한 장기 대책을 세우기 위해 신문·통신·잡지 기타 출판물을 발행하고 교육기관과 학술단체 및 사회단체들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시대·사회적 배경 하에서 소파의 실천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3·1운동이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가운데 민족주의 소년 운동 차원에서 5월 1일 어린이날이 제정됐다. 일제는 이에 맞서 5월 5일 아동보호일을 내놓았다. 3·1운동의 열기가 한국 어린이들에게 파급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5월 5일에 담겼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제는 단순히 날짜만 바꾸는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5월 5일 행사를 통해 '일본 어린이와 한국 어린이의 일체화'를 달성하고자 했다. 내선일체를 어린이 단계에서 관철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주희 논문은 "1920년대 시행된 조선총독부의 아동보호일은 조선인과 일본인 아동이 함께 참가하는 형태로 추진되었던 만큼 내선융화적인 성격이 강하게 내포"됐다고 설명한다. '조선 어린이'이는 '내지 어린이'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메시지가 5월 5일의 강조점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5월 1일 어린이날에 담긴 '3·1운동'과 '노동자' 같은 코드를 견제할 목적으로 5월 5일을 내밀었다. 이를 통해 내선일체형의 한국 어린이를 육성하고자 했다. 5월 1일이든 5월 5일이든 날짜가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날짜 하나에도 커다란 힘이 있기에 일제가 날짜를 변경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1945년에 물러갔지만, 그들이 만든 5월 5일 어린이날은 아직 남아 있다. 어린이날 날짜의 지정은 어린이 정책의 총론에 속한다. 이런 총론에서부터 식민 잔재가 발견된다는 것은 어린이 정책의 각론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의 흔적이 숨어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만든다.
오마이뉴스 / 김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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